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학살 (문단 편집) === 19일 이후 '''"[[인간사냥]]"''' === || [[파일:GHi6QkB.jpg|width=450]] || [[파일:인간사냥3.jpg|width=400]] || {{{#!folding ※ 5월 21일 이전 사망자 : 보기 / 접기 ||<-3> ''5월 21일 이전 사망자''[* 5월 18일부터 20일까지의 사망자 명단으로, 광주역 시위에서 사망한 5명은 제외하였다. 제외된 이들은 나중에 따로 표로 후술하겠다.] || || 김경철 || 김안부 || 김경환 || || 김인태 || 김재형 || 박기현 ||}}} 후술한 바와 같이 19일부터 저질러진 공수부대의 진압은 어찌나 잔인하였던지 '''심지어 공수부대와 함께 시위를 진압하러 온 광주 경찰들조차 이 참상을 보다못해 사람들을 재량껏 숨겨주거나 심지어 시민군과 시위대에게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라고 애원하는 정도였다.''' 이날 아침부터 학생들이 공부 중인 학원 강의실에 난입해 마구 구타하기도 했으며[* 중앙일보 취재기록. 출처: 5 18 특파원 리포트, 183.], 시민들이 보는 데서 학원생의 옷을 벗겨[* 흘러내리는 바지로 인해 도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 구타까지 했다.[* 위의 기록, 184.] 오전 11시엔 소위 한 사람이 시민들 돌에 부상을 입자, 계엄군은 시민들이 보이면 무차별로 구타를 했다. 11시 25분엔 공수부대원들이 동구청 민원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2명을 잡았고, 구청 변소 앞에서 8명이 진압봉과 전투화로 때렸다. 11시 34분엔 동구청 앞 도로에서 머리가 길고 젊기만 한 사람은 무조건 잡아서 허리띠를 빼앗아 차창 옆에 던진 뒤, 엎드리게 해서 진압봉으로 무차별로 갈겨댔다. 일부 시민은 머리에서 피가 흘러 윗옷이 빨갛게 됐다.[*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2.] 시위대가 안 보이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때려 팰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묻지마 범죄|아무 시민을 뒤져서 패고 끌고 갔다.]] >「쓰고 있는 베레모를 벗고 방탄 헬멧으로 바꾸어 쓰라는 이 지시는 곧 차량에서 하차를 의미하고 어디선가 시위대와 맞닥뜨려 시위 진압을 의미한다는 걸 사전교육을 통해 저희는 잘 알았답니다. 차량은 다시 양복 복개상사에서 좌회전으로 돌려서 전차량 금남로에 단숨에 달려가 관광호텔 앞에 정차를 하니 여기저기 돌멩이가 어지럽게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더군요. 차량에서 하차는 하지 않고 기다리는데 시위대는 전부 도망갔으니 전 병력이 하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2~4분) "하차"하는 명령이 하달되더군요. 이 명령이 곧 우리 귀에는 "무자비하게 젋은 사내는 두들겨패라"는 지시로 들렸읍니다... 차량에서 하차하니 이미 다 시위대는 뿔뿔이 도망치고 누군가에 이 증오심을 풀어야겠는데 시위대는 없고 무두다 그 근처 관광호텔, 다방, 이발소 등등 건물을 수색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때 나는 관광호텔 뒤에 있는 미도장인가 하는 여관을 7~8명이서 수색하기 위해 갔더니 앞에 철문이 닫혀 있더군요.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안 열어주어 담을 타고 다른 사병이 넘어 들어가서 철문을 여니 몇몇 종업원이 우르르 나오더니 우리 집에는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차라리 뒷문을 통해 피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 개새끼들이 겁대가리 없네"하면서 [[태권도]] 동작 발차기로 2단 뛰어차기로 일부는 때리고 일부는 진압봉으로 구타를 시작했읍니다. 이 진압봉은 서두에 설명했듯이 너무나 단단하고 무게가 있어서 조금만 힘을 가해서 때리면 손목이나 팔목으로 막으면 팔이 부러지는 것이었읍니다. 4~5명의 종업원이 불과 2~3분 사이 하얀 와이셔츠에 나비 넥타이는 간 곳이 없이 시멘트 바닥 위에 나뒹구든 것이었읍니다. 다시 일으켜세워서 4명을 전체 벽에 뒤로 기대게 하자 마침 지역대장 소령이 오더군요. 구타 에는 장·사병이 따로 없었읍니다. 그는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신고 있는 군화발로 있는 힘을 다해서 얼굴을 한 번씩 차는 것이었읍니다. >모진 것이 사람의 목숨이었읍니다. 얼굴은 뭉개지고 피는 쏟아지고 군화발의 충격으로 인해서 뒷머리를 시멘트 벽에 그토록 강하게 부딪쳤지만 쓰러진 사람은 없더군요. 다만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얼굴로 변했지요. 한편 함께 수색하던 일부 병력 2~3명은 각 객실을 수색하여 젊은 사람은 무조건 밖으로 집합시키고 있었읍니다. 10여 명 이상의 20대 30대 젊은 사람들이 공포의 표정으로 2열종대로 집합하더군요. 그중 30대 중반의 사나이는 신혼여행 왔다고 사정을 하더군요. 저희하고는 대화가 필요없었읍니다. '''무조건 무자비한 구타요, 연행 이외의 방법은 통하지가 않았읍니다.''' 신부가 나와서 사정사정하더군요. 눈물도 피도 없었읍니다. 일단 붙잡힌 시민들은 일차례 구타가 시작되었읍니다. 왜냐하면 도망을 못 가게 한다는 이유요, 기를 죽인다는 이유였읍니다. 다음 차례는 무조건 옷을 벗기고 팬티만 입히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차고 있던 본인의 혁대로 뒤로 손을 묶고 묶인 손으로 자신의 벗은 옷을 듣고 저희가 타고 왔던 트럭 옆으로 끌고 가서 다른 연행자와 함께 금남로 도로 한가운데 30~40명씩 집합 후 뒤로취침, 앞으로취침, 좌로굴러, 우로굴러 등 혹심하게 기를 죽이고 트럭 뒤에 2열종대로 집합시키는 것이었읍니다. 그 후 차량에 탑승하면 손은 뒤로 묶인 상태에서, 보통 성인도 타기 힘들 정도로 높은 차량을 타는 것이었읍니다. 뒤에서 다른 연행자가 머리를 들어서 밀어 올리고 타는 연행자는 죽도록 올라타는 것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요, 또한 몽둥이 세례 때문에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모를 정도로 무섭더구요. 차량에 탑승하면 2~3명의 통신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 숙여" "고개 숙여" 지시합니다. 왜냐하면 고개를 들고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 용기도 생기고, 특전사 요원이 2~3명이라는 것을 알면 집단으로 대항하여 도주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거나 옆사람을 보면 위에서 기다리는 요원이 또한 몽둥이로 등을 사정없이 내리친답니다. 그리고 차량으로 조선대학교 종합운동장으로 이동시킵니다.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차량이 연병장에 클랙슨을 울리면서 도착하면, 잔류하고 있던 행정병이나 취사병 경계 대기병 등이 진압봉을 들고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량에서 하차시켜 다시 줄을 세워 다시 기합과 구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 >...글로 적을 수 없도록 구타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육관 건물에 수용시킵니다. 앞뒤 문에는 4~5명씩 초병을 세우고, 안에서 4~5명이 구타를 또 한답니다. 그리고 잠시 대기하다가 상무대 31사단으로 보내집니다. 시위를 하였든 하지 않았든지 젊은 사람이라는 죄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한 번 붙들리면 3~4차례 극심한 구타와 기합 등으로 인간의 한계를 지나버릴 정도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35~37쪽 (편저자 윤재걸은 이 수기를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21쪽.) 참고로 이 수기가 실린 책에선 정작 수기를 쓴 사람의 정보가 전혀 없고 '공수부대원'이라고만 되어있다. 다만 글 내용을 봤을 때 11공수여단과 일치하니 11공수여단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나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12쪽, 64쪽에서 이 수기를 쓴 사람이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씨 라는 것이 밝혀졌다. >1980년 5월 19일, 11공수여단의 행위에 대한 11공수여단원 하사의 증언(본인은 5월 18일로 잘못 알고 있음)」 금남로 3가 미도장여관 1층에는 종업원인 김영대(32), 김병렬(17), 손병섭(26), 박필호(21)와 40대 투숙객 2명이 있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데모하다 쫓겨 온 놈들을 내 놓아라'하면서 개머리판과 진압봉과 군홧발로 그 사람들을 뚜들겨 패고 옷을 벗겨 팬티 차림으로 만들고는 조선대학교 체육관으로 끌고가 구타를 하였다.[* 정상용, 조홍규, 이해찬, 송선태, 서대석, 이강술, 유시민, 차영귀, 송상규 함께 지음, 광주민중항쟁, 181 189.] 신경진(35) 씨는 광주관광호텔 앞에 서있다가 '와' 하는 소리에 영문도 모르고 제일은행 광주지점 옆길로 뛰어들다 넘어졌다. 공수부대원들은 뒤쫓아가서 진압봉으로 치고 대검으로 오른쪽 무릎을 찌르고 군용트럭에 실어갔다.[* 김영택, 52~54.] ||<|3> [[파일:SLJmvFZ.jpg|width=430]] || [[파일:6499X4g.jpg|width=400]] || || 피 흘리며 끌려가는 시민들과 이를 무시하는 위생병[* 왼쪽 사진의 최씨 남매다.][* 적어도 현장에 있는 의무부대원들은 적어도 응급처치 정도의 가벼운 치료는 해 줘야 하는데도 이를 무시했기에 사람이 두들겨맞아 죽고 다치는 것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했으며 심지어 박남규 씨를 구타하기까지 했기에 그야말로 훌륭한 직무유기의 표본인 셈이다.] || ||[[파일:무등고시학원생을 구타하는 계엄군들.jpg|width=400]] || || 계엄군에 무참히 폭행당한 채 끌려가는 남매[* 이 사진 속 인물들이 오랫동안 '구타당해 끌려가는 신혼 부부'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08년 [[광주일보]] [[https://news.nate.com/view/20080508n04158|취재]] 결과, 최양민 씨(왼쪽 남성, 당시 26세)와 최양미(오른쪽 여성, 당시 24세, 1996년 사망) 남매임이 밝혀졌다.] || 무등고시학원 앞에서의 가혹행위 || 어떤 젊은 남매는 멀쩡히 길을 지나가다가 공수부대원한테 얼굴에서 피를 흘릴 만큼 두들겨 맞았다. 학원이 많아 학원가 거리라고도 불렸던 금남로 1가 YWCA 건물 옆길에서 두 여인이 걸어갔다. 공수부대원들은 그 중 20대로 보이는 여자를 갑자기 진압봉으로 때렸다. 다른 여자가 항의하자 마찬가지로 진압봉으로 때렸다. 고시학원에서 나오던 학생들은 그 광경을 보고 '우~'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은 그 학생들을 두들겨 팼다. 학원 안에 있던 학생들도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야유를 보냈다. 그러자 이번엔 학원 안으로 들어가서 조경숙(20) 씨를 비롯한 수강생 50명을 진압봉과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패고 최용범(20) 등 10명은 밖으로 끌고 와서 밖에 있던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두들겨 팼다.[*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 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20쪽.] 군인들은 오후에 더욱 잔인해졌다. 11공수여단 63대대 부대원들의 증언이다. >「우리 부대가 처음 광주에 도착한 19일 오전은 전날의 잔혹한 진압 때문인지 학생들의 시위가 있기는 했지만 간혹 몇백 명쯤 모여 구호를 외치다 군인들이 쫓아가면 도망할 뿐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 >그러나 오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에 화가 난 군인들은 난폭해지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시장이나 거리 어디서고 젊은이들은 무조건 잡아서 두들겨 패고 옷을 벗기고 진압봉과 총검으로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천여 명의 공수 요원들은 흩어져 시위하던 학생들이 건물이나 주택으로 도망을 가면 쫓아 들어가 거기 있는 젊은 사람들은 다 데모대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밟고 때렸다. 그러다 보니 '''생업의 현장에서 혹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애꿎게 잡혀 짓밟힌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속한 중대 병사들이 한 여관에 들어가 한 젊은이를 찾아내 얼마나 심하게 다루었는지, 얼굴과 머리에 피가 낭자하고 공포에 질린 그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처롭게 빌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사정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에게 잡혀 온 사람들은 옷을 벗기고 군화에 채이며 머리를 땅에 박고 줄지어 앉아 있다가는 군용 차량에 실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나 조선대로 온갖 학대를 다 받아가며 연행되어야 했다. 시장이나 길가에 서 있던 그곳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처음에는 용감히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태가 도를 넘는 순간부터는 감히 대드는 사람도 없고 다들 눈치만 보며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무자비한 진압을 통해 시내를 평정하고 돌아오던 지휘관들과 공수부대 요원들의 자신만만한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한 마디로 '개새끼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감히 까분다'는 식이었다.''' 19일인지 20일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시내를 돌다 돌아와 보니 조선대 교정에는 군인들에게 잡혀 온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그 넓은 운동장에서 수십 명의 군인들에게 사정 없이 맞고 짓밟히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시궁창을 기어야 했고, 운동장 선착순을 수십 번씩 해야 했고, 그 중에서도 늦는 이들은 군홧발과 진압봉에 채이고 맞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또 20일인가 그 다음 날인가도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헌병대가 쓰고 있던 체육관 건물에서 두 명의 젊은이가 하얗게 죽어 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차량에 실려 오던 도중이나 아니면 그런 와중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일 것이다. 매 맞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군용 트럭으로 수송하면서 그 속에 몇 발씩 가스탄을 터뜨린 군인들도 있었다 하니, 그런 와중에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그런 처참한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 >11공수여단 63대대 이경남씨의 증언, 20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1999년 당대비평 - 20세기 야만과 결별하기 위하여, 207~208」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계속 연행 구타 등을 하니 참 무고하게 길을 가다가 많은 젊은이가 피해를 보았죠. 또한 조직적으로 시위를 했던 시위대는 별로 연행자가 없었으리라 나는 생각하오. >---- >-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38」 오후 7시 30분쯤 최미자(19)씨는 학동 남광주역 부근에 있는 친구집에 가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장갑차다'고 외쳤고, 사람들은 골목길로 달아나고 최미자씨도 같이 달아났다. 장갑차를 타고 온 공수부대원들은 대검질과 함께 발길질을 했고, 그 중 최미자 씨는 오른쪽 겨드랑이와 젖가슴 사이 오른편을 대검에 찔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정상용, 조홍규, 이해찬, 송선태, 서대석, 이강술, 유시민, 차영귀, 송상규 함께 지음, 광주민중항쟁, 1990, 188쪽.] 금남로를 뺀 도로에는 시내버스와 택시들이 운행을 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그 차들을 세워 운전자들을 마구 두들겨 패는 일을 벌였다. 부상자를 병원으로 운반해준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런 기사들 구타 사건들은 운전 기사들을 분노하게 했다.[*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26쪽.] 동구청 건물 1층에서 전투복을 입은 경찰국 작전과장 안수택 총경은 시민을 몇 명을 방면해줬다가 공수부대 장교한테 '왜 폭도들을 빼돌리느냐'면서 두들겨 맞았다. '''군이 경찰까지 두들겨 팼던 것이다.'''[* 김영택(동아일보 기자),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38~39쪽.] 경찰들은 공수부대에게 쫓기기도 했다. >병원 숙소가 11층에 있어서 밖의 상황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도청 쪽을 쳐다보고 있자 군인들이 경찰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경찰들이 골목을 쫓기며 군인들이 뒤에서 쫓고 있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을 목격했다. >---- >김승호 (성모안과의원장. 당시 전남대병원 안과 레지던트 1년차). 눈알이 터진 환자도, 5.18 의료 활동 <자료 기록 및 증언>, 광주광역시의사회, 162쪽. || [[파일:QSsr4Uv.jpg|width=400]] || [[파일:oeMKq4w.jpg|width=400]] || 1989년 국회청문회를 대비해 보안사에서 작성한 문건에도, 계엄군이 무차별로 구타하고 무혐의 가게 종업원 및 배회자를 연행했으며, 버스와 택시를 검문해서 학생들은 모두 연행했다고 나온다.[* 1차 출처: 보안사3처2과, 광주사태전말보고, 1989, 383-1989-8, 54쪽, 2차 출처: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77쪽.] 시민들은 그 순간들을 자기 집에서 쳐다봤다. 군인들은 마이크로 말하며 '문을 닫아라', '커튼을 쳐라', '내려다 보면 쏴버리겠다'고 위협을 하고, 베레모를 쓴 지휘관이 지휘봉을 들고 금남로 2가와 3가 사이에 나타나 길 양쪽을 올려다보며 문을 닫고 내려보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 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19] 19일 오후 5시쯤에 광주시 서구 월산동 32의 22 4통 1반에 사는 김안부(당시 35세)씨는 광주공원 근처 전남주조당 앞 공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이는 공수부대원들에게 맞아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시체는 전남대병원 영안실에 안치됐고 부인인 김만복씨는 이 사실들을 다른 사람들에 전해 시민들은 사망자가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 김영택,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63.] 그러나 당시 전남대 의대의 시체 검안서에서 뇌가 손상되는 '뇌좌상'과 머릿속에 총탄이 박힌 '맹관총상'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총격으로 인한 최초 사망자가 아닌가 하는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444586&ref=A|보도]]가 있었다. 중앙일보 취재 기자인 김충근 기자는 피곤해서 방공호에서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있었는데, 군인들이 짓이겨진 시체 2구를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5 18 특파원 리포트, 22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